추억으로 가기

가족묘 조성

선 인장 2012. 10. 7. 16:13

 

 

수락리 524번지 면적 1342㎡(약405평)엔 선친의 피와 땀으로 조성된 천수답이 있다.

 

다랑치 논은 기계 없던 시절에 삽과 괭이로 파고 돌을 골라내어 야산을 개간해 만들어 놓은

 

땀의 결실이었다.

 

산에서 흘러내린 조그마한 도랑물을 옆에 두었다지만 해마다 농수를 대기엔 역부족이어서

 

가문 해에는 농사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애가슴인 다랑치였다.

 

지금은 논 밑으로 수로를 내며 땅이 좁아져  두마지기가 남았다.

 

풀과 웅덩이 투성이인 구불구불한 농로길을 한참을 돌고돌아 발품을 팔아야만 닿을 수 있는 그곳은,

 

어린날 농삿일을 도우러 가기 싫어 몰래 입 나왔던 내 투정과 구슬땀이 배여있는 곳이다.

 

여름방학엔 주로 깔망태기를 지고 깔을 베어 날르고,

 

겨울이면 그 윗산에서는 지게를 숱하게 엎어가며 땔감을 해 날랐던 곳이기도 하다.

 

항상 배가 고팠던 기억도.. 남의 밭에서 가지며 참외며 물외 등을 서리해 먹고 때론 덜 익은 콩을

 

걷어다가 불을 피워 넝쿨째로 구워먹던 기억도, 내 대에 까지만 맛볼 수 있었던 낭만이리라.

 

방학이라 하면 주로 그러한 기억들이 지배적인 걸 보면 한 시대의 굶주린 시대를 잠시나마  

 

몸으로 껴안고 살아야 했던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난 아픔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이 악물고 살았던 내 젊은날의 초상도 거기에 있음이라.

 

 

 

선친은 째져 벌어진 손가락.. 가락.. 아물새 없이 그곳을  경작하다가 먼 하늘로 가셨다.

 

술 좋아하고 인정 많아 생전 남의 일은 댓가 없이 술 한 잔에도 너털웃음 지으며 다 해주고,

 

자기 일은 미뤄둬도 남의 일은 먼저 해 주어야만 직성이 풀리던 바보 같은 분이셨다.

 

남의 험담 한마디 못 하셨어도 지서(지금의 파출소) 앞을 지나려면 항상 떨린다던

 

선친은 지금은 큰집 문중산 기슭에서 영면에 드셨다.

 

 

 

가족묘를 만들기 위해 몇년전 그 다랑치 논들을 포크레인으로 합하여 밀어놨는데,

 

추석에 가보니 띠풀은 허리에 닿고  칡은 땅 속 깊숙히 뿌리를 박아 밀림을 이루고 있었다. 

 

추석을 앞두고 건강하던 모친이 갑자기 병을 얻어 마음이 급해졌다.

 

뇌경색으로 인한 치매는 아들도 몰라 보는 처지에 이르렀으니  대책을 아니 세울 수 없는

 

지경에 처한 것이다. 

 

모친이 그걸 예감했는지 올초 묘지정비를 하고 싶어하는 걸 점쟁이가 만류해서 미뤄오던

 

일이었는데, 내일을 기약하지 못할 처지인지라 일단은 터를 닦아 놓기로 한 것이다.

 

묘일을 전문으로 하는 친구가 수고해 주었다.

 

 

 

이젠 시멘 포장이 되어 있는 묘터로 가는 길엔 억새가 한창 몸매를 자랑하고 있다.

 

앗, 한반도 지도가...?   저~ 아래론 수문포 바닷물이 금방이라도 올라와 발밑을 적실듯 하다.  

 

 

축대쌓기

 

흙을 뒤집어 풀뿌리 털어내고 다듬기- 빗물 고랑도 내고 둑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