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으로 가기

들녘에서

선 인장 2007. 5. 30. 21:27

 

 

 

 

 

 

   

 

 
 
지금 농촌 들녘엔,
 

날마다 보릿대 태우는 연기가 하늘을 메우고 있습니다.

 
보릿대를 태우는 연기는 다른 물건 태우는 연기처럼 맵지도 않고,

 

그 속에 든 알곡이 타는지 구수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곤 합니다.

 
이미 보리수확이 끝난 논에는
2모작 모내기를 하는 손길이 바빠 있구요.

 
논에 물을 잡으려 도랑을 정비하는 삽질,

 
트랙터의 논갈이하는 손길이 바빠지는 농번기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퇴근길에 차를 멈추고 보릿대가 타들어 가는 들녘에 서서


 어릴 적 생각이 나서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보리가 막 패던 시절 서릿발이 올라오던 논을 밟아주던 기억.

 

그리고 보리가 익어 갈 때쯤 한쪽에선 밀도 같이 익어가,

 

하얀 뜨물로 알곡이 영글어 가면 아직은 말랑한 보리와 밀을 뽑아다

 

냇가에서 나뭇가지를 주워 모아 불을 피웠었죠.

 

손가락 데어가며 모닥불에서 익은 보리와 밀을 꺼내서

 

손바닥 사이에 넣고 비벼서 먹으면, 한쪽은 익고 한쪽은 안 익은 보리라도

 

얼마나 구수하고 맛있던지 학교 가는 길에 지각도 하게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 보면 그 보리는 누렇게 익어서 수확을 기다리고,

 

그럴 때부터 소학교에선 노력 봉사를 나가게 됩니다.

 

우리가 자랄 때만 해도 일일이 손으로 보리를 수확하던 시절이라,


초등학교 3학년만 되면 고사리 손에 낫을 들고 
[보리베기 노력봉사]를

 

나갔거든요.

 

동네에서 신청 받아서 그 집일을 도와주는 건데요.

 

낫이 애들 손이 익지 않아 보리를 베다가 손가락이나 발목을 베기도 하고,

 

간혹 비얌이라도 나올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서 벌벌 떨면서 보리를 베던 기억.

 

주인양반이 더운데 하드(아이스바)를 빨리 안 가져오면,

 

앙꼬하드 ~ 를 외치며 다 베지 않는 보리를 눕혀서 다 벤 보리를 앙상하게

 

얹어놓은 심술도 부리고, 군데군데 무더기로 쌓여 있는 보리더미 위에서

 

장난도 치던 기억.

 

집에 와서는 보리수확이 끝난 들녘에서 보리이삭을 주우러 다니던 생각이 납니다.

 

보리이삭을 주워서 보리차도 끓여 먹고, 동네방앗간에서 빻아서 미숫가루를

 

해서 여름 내내  작두 샘(손으로 기구를 움직여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샘)에서

 

시원한 물 받아서 거기에 미숫가루 타먹던 기억 저편은 언제나 아스라한

 

그리움입니다.

 

*

 

내가 스물 몇 살에 직장을 잡아 두 번째 근무하던 곳은  전형적인

 

산골마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순박한지 토지경계나 사소한 시비로 다툴 만도 하건만,


일년에 그런 일이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정도로
순박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데요.


지금도 그곳을 생각하면 강원도 두메산골 같은 순박함을 
느낀답니다.

 

그것이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서 인지, 본디 사람들 품성이 그러했는지,

 

산세가 좋아 그러한 건지를 지금도 가끔 생각해 보는데요.

 

산세를 따지다보면 영암 월출산줄기중의 가장 풍요로운 곳이였습니다.

 

월출산이 영암에 있다지만, 영암 쪽으로는 바위만 앙상하여 영암사람들이

 

그 영향을 별로 못 받고요.

 

월출산 줄기 중에서도 둔부처럼 가장 살이 올라 있는 곳

 

그곳이 그 마을의 지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 그 면(面) 전체가 풍요로워서,

 

이웃 간의 분쟁이 없는 넉넉함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인물도 많이 나고요.

 

주로 예전엔 학자가 최근엔 장관들이 가끔 나는 곳.

 

근데요.

 

그 마을에는 아주 재미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면의 소재지가 이상하게 생겼습니다.

 

그 면의 소재지는 비가 오면 인근의 빗물이 모두 모이고,

 

젊은 남자들이 성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다행히 인근에 큰 하천이 흐르고 있어 장마철에도 집이 침수된다거나

 

하는 일은 없지만, 사람들은 그 소재지가 음기가 센 곳이라고 했습니다.

 

가로수가 옹이가 진다거나 상처를 입으면  한결같이 여성의 음부형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무가 자라다 상처를 입으면 대부분 그러하기도 하지만,

 

그 소재지마을 가로수 그곳은 얼마나 적나라한지 점잖은 사람들은

 

차마 그것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갈 정도이니까요.

 

또 하나는 그 동네에 3-40대 남자들이 없었어요.

 

특별한 사연이 없고 특별한 병명도 없이 남자들이 죽어 가는 것이였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뭐 그런 게 있어" 하고 안 믿는 사람들 젊은 내외가

 

인근에서 가끔 이사를 왔다가도, 어제까지만 해도 들녘에서 일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어 나가는 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나이 들어 그 동네에 찾아든, 나이든 남자어른들은 죽지 않고 잘 살구요.

 

암튼,

 

젊은 남자들만을 잡아먹는 그 소재지에는 젊은 과부가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직은 코흘리개 어린애들을 먹여 살리느라,

 

남의 논밭에서 마늘 일도 하고 자신의 텃밭도 가꾸고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여성들은 어떻게 남자 없는 밤(?)을 견뎌 나가는지

 

의문이 생기죠?

 

이미 남자를 알아 버린 여인들에겐 밤이 참으로 고통이 아닐 수 없는

 

건데요.

 

그때까지만 해도 재혼이 죄악시되었고, 재혼한 사람들은 사람취급도

 

못 받았으며, 또한 아이들 문제로 항상 불화가 생기므로 대부분 애들을

 

데리고 홀로 살아가는데 본능만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근데요.

 

그 동네엔 군내버스가 하루에 두 번씩밖에 왕래하지 않고,

 

그것도 소재지 중간쯤에 정류장이 있어서 한번 외출을 하려면

 

소재지를 거쳐야 되므로 상가 앞을 지날 때  누가 오늘은

 

외출을 하는지를 다 알게 돼 버립니다.

 

택시회사도 그 근방에 있고 대부분은 다 얼굴을 알고 지내므로

 

어디를 함부로 외출한다는 것 자체가 곧 뭇 여인네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십상이었죠.

 

그래서 당시에 교통수단이 주로 자전거 오토바이였는데,

 

그것도 전부 외부로 노출된 것이라 그것도 마찬가지 입장이란 것입니다.

 

글믄,

 

그 과부들은 어떻게 그런 문제들을 해결했을까요?

 

답은 그 동네남정네들의 온몸을 던진 투혼(?)에 있었습니다.

 

그 마을엔 이장님을 비롯한 50대가 넘은 남정네들이 제법 살았는데,

 

그 남정네들이 낮엔 밖에서 일하다가도 밤엔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합니다.

 

땅거미가 내려앉아 하나둘 집에 불이 켜지고 밥짓는 연기도 다 사라질

 

무렵이면, 유난히 높은 논둑아래 보리밭은 그네들의 천국이 되어 있었습니다.

 

둑 아래엔 유난히 보리가 빨리 자라기도 했으려니와 그 논둑이 벽 역할을 하여

 

그네들에게 안심을 가져다준 모양입니다.

 

이장님이 오늘은 순이네, 낼은 철이네를 불러다 과부들에게

 

밤이 인간에게 가져다준 희열도..신이 이 땅에 여성말고도 남성을 동시에

 

내려 보내준 의미를 학습(?)하는 이들의 단 냄새나는 콧노래가

 

밤이면 밤마다 이곳저곳에서 들려 옵니다.

 

그런다고 딴 살림을 차린다거나,

 

둘이 정분이 나서 야반도주를 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고,

 

어쩌다 보리밭에서 서로 다른 짝을 만난 사람들도 "어이 여보게, 수고하시게"

 

하고 뒷머리 벅벅 긁으며 웃고 지나갈 정도였으니,

 

남자하나 여자하나를 두고 싸울 일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남정네들이 서로 돌아가면서 날을 잡아 그 과부들을 위로(?) 해

 

줬으니  서로가 공범의식도 가졌을 법합니다.

 

그러면 남자들이 야밤에 바빠하는 것을 그 집 안주인마님은 모르느냐고요?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겠죠?

 

글믄,

 

질투를 하고 싸움도 나서 불화가 생기지 않겠냐구요?

 

노우~

 

그 집 안방 마님도 다 알고 있고요.

 

 동네 사람들에게도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다 알면서도 비난하거나 험담하지 않고
서로 봐주기로 암암리에 묵계가

 

이뤄진 셈이죠.

 

그래서 짓궂은 아낙들은 들판에서 서로 만나 일하는 자리에서

 

"어이, 철이네! 어젠 누구 아범이 급히 그 논둑으로 가던데

 

그래서인지 철이네 얼굴이 오늘은 활짝 피었어? 좋았던 모양이네?"

 

" 허허이~ 열흘가뭄에 단비가 내렸다네. 얼씨구 조오타아 시절 좋구나아~"

 

하고  놀리면 얼굴을 붉히고 말지 누구누구는 누구와 뭐 했다네 하고

 

험담하지 않는 미덕이 있었습니다.

 

글믄,

 

보리를 베고 난 담에나 겨울엔 그 행사(?)를 보리가 필 때까지 참느냐고요?

 

그게 어디 맘대로 되는 일입니까?  참기까지 하게.

 

겨울이면 하우스 재배를 많이 합니다

 

거기에 오이랑 토마토 글고 야채 등을 심죠.

 

그러면 하우스에 가보시면 다 알겠지만,하우스 입구에 대부분 거적때기를

 

깔아놓고 거기서 도시락도 먹고 옷도 갈아입고 합니다

 

여성들은 소위 몸뻬라고 하는 일복을 거기에 두고,

 

갈아입고 하우스 일을 하다가 일을 마치면 흙 묻은 몸뻬를 벗어놓고

 

귀가하는데,  따로이 수건을 둘러매고 밤 외출(?)을 하기가 쑥스러운

 

연인들이  그냥 츄리닝 바람에 왔다가 일을(?) 보고 뒤처리할 화장지도 없고

 

수건도 없으니 어떻합니까?

 

그 몸뻬로 뒤처리를 해버려서, 다음날이면 그 하우스 안주인이 난립니다.

 

"아이구 또 누구여? 누가 또 몸뻬로 닦았어?" 하고  투정 아닌 투정도 하고

 

그러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하고 박장대소도 하고 그럽니다.

 

"아이구 징해. 그거 묻은 옷을 입고 어떻게 일하라고 그런데?


내가 차라리 화장지를 사다 걸어놓던지,
수건을 몇 개 걸어 놓던지

 

해야지  이거 찜찜해서 못 입겠네" 여기까지 오면 모두들 배꼽을 움켜쥐고

 

땅바닥을 치는 사람, 구르는 사람, 너무 웃어서 눈물콧물이 나오는

 

사람까지 아주 가관입니다.

 

글믄 여름엔 어떻게 일을 보나 하고 관심을 두던 차,  어느 날 다리 밑에서

 

수상한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정강이까지 차는 냇물에서 자꾸만 사람이 움직여서 '저 양반이 밤중에

 

고기를 잡나?' 하고 더 가까이 가봤더니, 한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선 채로

 

엉켜 있더군요.

 

한사람은 머리털 중앙이 헬기장인 영락없는 마을 이장님이셨고,

 

상대는 내 단칸방 옆집에 사는 혜선이어머니였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얼굴이 화악 달아오지만 당시로선 정말 충격이였습니다.

 

아, 혜선이어머니 얘길 하니 그 혜선이가 생각나는군요.

 

혜선이가 초등학교 5학년 이였는데, 날 자신의 이상형으로 생각했는지

 

자기 어머니에게 "나 나중에 크면 그 아저씨랑 결혼할거야" 하고 말해서

 

그 어머니가 당황했단 소문이 마을에 쫙 퍼져서 웃음을 지었던 생각.

 

하교 길에 가끔씩 내 근무하는 사무실 문기둥에 서서

 

행여나 모습이 들킬까봐 몰래몰래 날 훔쳐보던 눈이 유난히 큰 아이.

 

이미 남의 아내란 이름으로..

 

누구의 엄마란 이름으로 살고 있을 그 아이에겐 나는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까?

 

첫사랑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을까?

 

아님 고향이란 그리움으로 남아 있을까?

 

**

 

보리밭 얘길 하다보니 얘기가 옆으로 샜습니다.

 

농촌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그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보리밭의 추억들 하나둘 가지지 않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보릿대를 태우는 들녘에서 난 돌아갈 수 없는 그 아득한 나라를

 

아직도 꿈꾸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