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도 가는 길.
11월17일 아침 청산도로 향하는 마음이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
간밤에 은행나무 가지를 세차게 흔들던 바람은 어디로 가고 거리에는
꿈의 시체들이 무더기로 누워있었다.
햇님은 늦잠을 자는지 검은구름만 낮게 깔려있고,
어느새 차가와진 기온은 점퍼까지 갖춰 입은 옷깃을 여미게 하였다.
긴 밤을 뜬눈으로 보낸 탓인지 그리 가볍지 않은 몸을 추수려 아침도 챙겨
먹을 새 없이 동료가 운전하는 승용차에 올랐다.
시간이야 많이 남지만 초행이라 배 시간을 놓칠 새라 괜히 초조해졌다.
차는 강진군 마량항을 거쳐 새로 놓인 고금대교 위를 날듯이 달려
섬 외곽으로 꼬불꼬불하게 이어진 해안도로를 따라 고금항에 도착했다.
도로는 예전 섬사람들이 다니던 길을 그대로 포장하여 겨우 2차선을
낸 것으로 갓길도 없고 인도도 없어 속력을 낼 수 없었다.
네비게이션의 도움을 받고자 켜 보았으나 이 문명의 이기는
섬 길을 인식하지 못하고 큰 도로를 따라 완도 항으로만 자꾸 가라고 하고,
완도항 여객선터미널에 문의해도 큰 길을 따라 무조건 완도항으로만
오라고 한다.
마량~고금간 연륙교가 최근에 개통된 탓이리라.
그러니 이곳 주민이거나 자주 다니는 택시기사가 아니면 알 턱이
없었던 듯 싶다.
고금항에는 신지도를 거쳐 완도로 향하는 화물차만 몇 대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빈속을 달래려 구멍가게 빵이라고 사보려고 하였으나 평일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슈퍼출입문은 굵은 자물쇠로 채워져 있고 ,
작은 섬이라 식당도 없어 자판기에서 따끈한 커피한잔으로
몸을 덥혔다.
감청색의 맑은 바닷물 건너로 신지도가 보였다 .
철선에 차를 싣자 철선은 곧 육중한 몸을 틀어 10분을 달려
섬 저쪽에 내려놓는다.
그곳에서 신지대교를 건너면 바로 완도읍이다.
섬길을 안 일행 덕분에 완도항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1시간이나
일찍 도착하여 배를 기다렸다.
완도항 터미널에서 표를 구입하고 시간이 남아 근방 식당을 찾았다.
상화식당 사장아주머니는 나이가 들어 뵈는데도 피부가 곱고 얼굴이
둥굴어서 인상이 좋다.
빈 식탁과 의자들이 줄지어 있는 넓은 홀을 찬바람이 휑하니 쓸고 가,
음식을 기다리기가 지루했는데 금방 내어온 다시마국물이 싱거운 듯
하면서 아주 감칠맛이 나서 염치불구하고 더 시켜 먹었다.
반주로 아침부터 소주잔을 들었더니 몸도 훈기가 더해졌다.
시간을 맞춰 인적사항을 표에 적어 넣고 배에 올랐다.
그제서야 햇님이 얼굴을 보여주어 시야가 넓어지고 기분이
상쾌해졌다.
점차 멀어져 가는 항구와 점점이 한 점씩 떠있는 섬을 바라보다,
배 뒤로 맴돌다 휘돌아가며 점차 포말로 부셔지는 물보라를 바라보는
사이 배는 45분을 달려 청산도에 도착했다.
청산도는 전남 완도항에서 약19.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섬이다.
동쪽으로 거문도, 서쪽으로 소안도, 남쪽으로 제주도, 북쪽으로는
신지도를 바라보고 있다.
총 면적 48평방킬로미터, 인구는 약 2천여명이라 한다.
청산도 도청항에서 하선하여 섬 우로를 택해 나아갔다.
다도해중의 하나인 청산도답게 돌섬이다.
안내석에 보니 고려조 때 처음으로 사람이 들어가 살다가,
조선조 임진년 무렵에 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켰고 난이 끝난 후
다시 주민들이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돌을 쌓아 만든 다랑치 논과 밭에는 벌써 가을걷이가 끝나고 새파란
보리가 자라고 있었고, 섬 인구가 차츰 줄어드는 탓인지 묵정밭에는
키 작은 억새가 솜사탕같은 꽃송이들을 달고 있었다.
초기 정착민들이 먹고 살겠다고 억척스럽게 원시적인 농기구로
야산을 개간해서 만든 길다랗고 꼬불꼬불한 논과밭 경계석마다
그들의 피땀이 묻어있는 것 같아 일순 숙연해졌다.
'봄의왈츠’ 세트장으로 가는 길에 절벽 위에 서 있는 초가지붕 아래
에서 섹스폰을 부는 남자를 그윽히 바라보는 여자의 시선이
사랑스럽다.
섬 이곳저곳 군데군데 자리 잡은 촌락들은 뒷산이 높아 물 걱정은
안해도 될 듯 싶었다.
성수기가 아니어서인지 관광객 몇 명이 서서히 차를 몰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주민들도 이미 추수가 끝나서인지 한가로와 보였다.
신흥해수욕장에 도착해보니 만조가 되어서 해수욕장 자취를 찾을 수
없어 진산해수욕장으로 이동했다.
진산해수욕장은 둥글둥글한 갯돌로 이루어진 해변이다.
청산도의 여러 갯돌 해변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운치 있는 해변이다.
더욱이 찾아오는 이들이 많지 않아서 가족이나 연인끼리 호젓하게
해수욕을 즐기기에 좋고 주변에는 폐교된 분교와 작은 상점이 있어
야영하기에도 좋을것 같았다.
파도가 수 천년동안 어루만져놓아 큰 자갈들로만 이뤄진 해변에 앉아
밀려갔다 밀려오는 파도를 응시하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귀로에 나섰다.
돌아오는 길은 날이 다시 흐리고 구름 낮게 가라앉더니 신지도에 도착하여
도선할 때 눈비가 내렸다.
모처럼의 비라 반가운 마음에 옷에 딸린 모자를 뒤집어 쓰고 썬그라스를
낀 상태로 뱃전에서 그대로 맞았다.
바람까지 가세해서 자꾸 몸을 흔드는 바람에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