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 평생 일밖에 모르던 사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셨다.
먼저 이 세상을 뜬 남편제사를 지내러 간, 서울 큰아들집에서였다.
병명은 뇌출혈.
제사가 끝나고 동녘이 채 밝지않는 신새벽길.
일찍 일어나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더라고.
큰아들내외는 옛생각이 나서 혼잣말을 하려니 하다가, 오후가 되어서야
병원에 모시고 가게되고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
MRA 촬영결과 이미 뇌혈관이 반이상 막혀 그 부분이 검게 촬영되었다.
인지와 언어장애는 바로 이어지고, 옛기억들이 현실인지 과거인지를 구별 못하는
치매증상이 왔다.
가까운 요양병원에 입원하였으나 본인의 처지를 부정함으로 적응하지 못했다.
고향집으로만 가자고 고집하니 그곳 간병인이 애를 먹었다.
평생 갇혀 살지않아 봤으니 그 시설이 오죽이나 답답했을까?
결국 24시간 동숙하는 조건으로 간병인 한사람을 딸려 고향으로 내려왔다.
먼 친척이 마침 혼잣몸이어서 간병인을 자처하고 내려왔다.
치매증상은 여러 행태로 나타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주위사람들을 의심하는
의심병이다.
24시간 숙식을 하는 사람을 믿질 못하는 것이다.
자신 몰래 옷과 돈을 빼돌린다고 의심을 하더니 '나가라'고 그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하니 그 사람이 버티질 못하고 나가 버리고, 하는 수없이 고향집 가까운 요양시설로
옮기기로 했다.
입소자들의 대화내용도 농사일이 주로 될 것이므로 적응하기가 더 쉬우리란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등급을 받는 데에도 시일이 소요되었고, 요양시설로의 입소도 바로바로 이뤄지지
않았다.
군소재지에 3군데, 면소재마다에 한개꼴로 있는 요양시설이 꽉차서 그곳으로의 입소도
순번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잡음과 진통이 있었다.
6형제가 제각각 한 가정을 꾸리고 살면서 홀로된 어머니 한 분을 못 모시냐는 것이었다.
처음엔 내가 모시네 마네 하다가 나중엔 돌아가면서 모시는 게 어떻냐 등등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결국은 시설로 모시는 게 옳다는 결론에 다달았다.
모두 맞벌이를 하는 처지에 집에서 모시는 것도 그렇고 대소변 문제도 그렇지만,
가만히 앉아있지 못한 성격으로 누가 감당하기엔 벅찬 일이었던 것이었다.
요양원에서의 적응은 쉽지 않았다.
간섭받기를 싫어하고 갇혀 지내는 걸 못 견뎌하셨다.
한번 면회를 갈 때마다 어찌나 따라나오려고 하는지 참으로 난감지경이었다.
'언제 자식들이 와서 나를 집으로 데려다 주려나' 하고만 생각하고 있으니 당신도
하루하루가 길었을 것이다.
내가 사는 집으로 모시고 와도 당신 혼자 사는 집으로만 데려다 달라고 졸라대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후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곳이 당신이 거처할 곳인지 안다.
면회해서 데리고 나와 식사 대접하고 바람 쐬준다음 시설에 모셔도 이젠 당연히
그곳으로 돌아갈 줄 안다.
말이 제대로 입에서 안 만들어지니 당신 자신도 답답해서 무슨 말인가를 끊임없이
하려는데 대부분은 못 알아 먹는다.
또 예전에 알았던 가까운 사람이나 자식들은 알아보는데, 금방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어제 사전 면회 신청했는데, 오는 시간을 내내 서성이며 기다렸다기 마음이 아팠다.
부쩍 마른 몸에 백발이 되어 배가 고프다고 반가이 따러 나선다.
요양원에서는 대소변 처리문제도 그렇고 식대문제도 있어서인지 배불리 먹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떡갈비로 식사하고 미장원에서의 염색시켜주니 한결 나아보인다.
기분이 좋은지 아들내외와 손주들의 손을 잠시도 놓으려 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열아홉에 읍내에서 소 매매업을 하던 외가에서 시집왔다.
아들은 집안에 기둥이니 뭐든지 해주고 딸은 그저 언문만 깨우치면 되고,
때가 되면 시집이나 가면 그만이라는 보수적인 가정에서 방출하다시피 시킨
결혼이었다.
시골 5일장에서 만나 안면이 생긴 부친들끼리 막걸리 몇 잔 나누다가 "우리집에 과년한
딸이 있네" 하고 내놓는 것을 "우리집에는 아들이 있네" 이렇게 역사가 이뤄진 일이었다.
당사자들의 상면식이나 의사와 관계없이 이리 어이없고 허망하게 쉽게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이 당시 농촌의 혼인성사의 한 형태였던 것이다.
그래서 읍내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더 깡촌으로 가마를 타고 온 어머니는, 슬하에
6남매를 낳았다.
정확히는 7남매인데 가장 잘 생긴 아들을 어릴 때 잃었다고 한다.
이 땅에 와 제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시들어버린 아들을 얘기할 때마다 눈물을 훔치는 걸
이따금 보고 자랐다.
시집이라고 와도 입에 제대로 풀칠하기 어려운 빈농에 시부모 모시고 사는 처지는 처음부터
참으로 고단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생활이라기 보단 생존투쟁에 가까운 버티기의 세월이었다.
그러한 처지임에 자식들도 철이 들기 전부터 농삿일을 거드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생존을 위해 발버둥을 쳐봐도 살림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는데,
다음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고단한 인생살이에서, 열심히만 살면 언젠가 이 지독한 가난을
벗어나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 그렇게 자식들을 교육 시켰다.
그러나 성실한 자가 복 받고 잘 사는 거라는 건 도덕교과서에나 나오는 이상에 지나지 않았다.
자식을 낳고도 바로 논밭으로 달려야 했고, 겨울에도 일로 손발이 쩍쩍 갈라지는 고통 속에서의
한 해 또 한 해의 세월로도 가난은 눈만 뜨면 귀신같이 온몸을 칭칭 감고 있었다.
벗어나려 하면 더 조여드는 악몽 속의 끔찍한 포승줄이었다.
이 땅의 법은 빈자는 절대 부자가 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으나,
농업을 포기 할 수 없었다.
중년에 한 때 행상으로 장사를 시작하여 제법 재미를 보았으나, 남편의 만류로 다시 땅을 파는
농군의 아내로 아니 농군으로 살아야 했던 세월이었다.
남자 농군들의 삶도 녹록지 않았지만 출산과 육아 거기에 매일 빨래와 식사준비를 하면서도
밭에 농작물을 심어 가꾸고 논일을 도와야 하는 몇중고의 시골 아낙의 삶이란, 참으로
고달프고 힘겨운 일이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내일에다가 대를 이은 가난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식에게
미래를 거는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
평소 입버릇처럼 자식들에게 "잘 되어서 나 주라고 안 한다. 너는 나중 이 고생 안하려면
공부 열심히 해라." 이렇게 당부하곤 하셨다.
생존투쟁의 장에서 자식들이 사고 한번 치지 않고 그 기대를 크게 저버리지 않았지만,
한계가 있었다.
농촌 빈민의 신분상승의 길은 검사나 의사가 되는 길인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어느날 영글은 민들레 씨앗이 바람에 날아가 새로운 곳에 정착하듯, 자식들이 흩어져
겨우겨우 사람사는 모습을 하고 살아가는 때에 그만 덜컥 병을 얻고 말았으니.....
인지능력을 잃어버린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사실까?
또 어느 세상을 사실까?
과거의 기억 속일까?
아니면 현실의 굴레일까?
한시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던 투박한 손에 구부정한 허리를 하고,
아직도 뭐 볼 게 남아서 눈빛이 저리도 빛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