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아침저녁으로 반소매가 쑥스러워질 무렵
국민학교 등교 길은 온통 코스모스 차지였다
그때쯤이면 나락도 영글어 길옆으로 고개를 숙이고
딸랑거리는 가방을 둘러 맨 소년의
허기진 배를 향해 웃으면
이삭 한 무더기 따다 잎에 넣기도 하였지
학교 가는 길은
밤새 내린 이슬에 젖어 함초롬히 피어있는 코스모스에 마음을 뺏기고
하교하는 길엔
황금물결처럼 출렁이는 들판에서 무언지도 모를 뿌듯함이
가슴까지 차 오르는 충만함도 맛보았지
분홍이 색색이 피어있는 꽃잎들 사이로
어쩌다 흰 꽃 한무더기 피어나고
간혹 빠알간 꽃잎도 피어나 신비함을 더해 주었었지
이제와 생각하니
그 애의 얼굴처럼 하이얀 꽃잎과
부끄러워 살짝 붉히는 뺨 같은 분홍과
재잘대면 더욱 이뻤던 쪼그마한 입술은 빨간 꽃잎
꽃밭은 새악시의 얼굴이었고
순수였고
나를 속되지 않게 끌어온 신비였다
길 옆 척박한 땅에 태어나도 불평 한마디 없고
자갈 땅에 뿌리를 내려도 억울해 하지 않으며
발로 밟아도 다시 일어서고
꽃잎을 철없는 아이에게 빼앗겨도 다시금 피우는 끈기
그러다..
그러다가...
달 밝은 밤이면
꽃잎 가슴에 묻고
남몰래 울고울어
눈물 채 훔치지 못하는 얼굴에
아침햇살이 비치면
배시시 수줍게 웃고 있는
아하!
코스모스는 내 고향이고 어머니고 누이였구나
내 고향 뜰에 곱게 핀 내님이였구나.
^^*^^*^^*^^*^^*^^*^^*^^*^^*^^*^^*
* 후기
오늘은 가뭄에 푸석이던 대지 위로 단비가 내리는 날입니다.
이젠 밤이 제법 이슥해졌는지 차량들 소음도 끊기고 빗소리만이 대지 위를 두드려 타악기를
연주해내고 있습니다.
이 밤도 편안히 보내고 계신지요.
이 사람이 선인장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天刑]이란 제하에 써 두었답니다.
코스모스를 향한 내 열정의 근본은 코스모스 자체가 청순과 강인함의 어울리지 않는 두 의미를
가진 탓도 있지만,
언젠가 내 곁에 와서 나에게 사랑고백 한번 못하고 속앓이를 하고 간 님이
코스모스를 닮았기 때문이랍니다.
내 첫사랑이랄 수 있는 그녀는
식구 많은 집에서 아들을 보기 위해 최후에 낳은 딸(7형제중 막내)이여서
환영받지 못한 탄생을 맞았다고 합니다.
태어난 날, 딸임을 안 아버지가 얼굴 보기 싫다고 이불인지 거적대기인지로 덮어 버렸대나 어쨌다나..
그러나 아버지 되신 분이 말년에 제일 사랑하고 같이 쐬주잔을 나눌만큼 의지했던 자식이
그 님이였었죠.
돌아가실 때까지 애잔한 맘을 가졌던 자식도 그 님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척박한 땅에서 태어나도 불평 한마디 않는 코스모스를 닮았다고 하고요.
내 첫사랑 그녀는 얼굴이 얼마나 맑고 흰지 파란 실핏줄이 목에 선명해서
조용한 카페에서 난 그걸 몰래몰래 훔쳐보곤 했었죠.
손을 대면 하얀분가루가 묻어 나올 듯 하고,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맑음이 투명해져서 어쩌면 내가 거기에 빠져 버릴 것도 같았답니다.
그리고 겁 많은 큰 두 눈은 사슴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어릴 적 키웠던 누렁이(농사용으로 기르던 소)의 왕방울 눈 같기도 한 게,
이따금 깜박거릴 땐 한없이 신비해서 그걸 한동안 보노라면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근심이 없었어요.
먼저 그녀가 무안하다고 고개를 돌릴 때까지
얘기를 하다 말고 찬찬히 들여다 보곤 했었지요.
그리고 빨간 루즈가 칠해진 그녀의 입술은 너무나 작아서
그게 열렸다 닫힌 것이 신기하기도 했었죠.
**
영락없이 어릴 적 보던 만화속의 캔디 모습인가요?
코스모스는 흰색과 빨강과 분홍으로 피어 납니다.
그녀가 즐겨 입었던 흰 양복 정장과 빨간 미니스커트는 흰색과 빨강을 닮았구요
아 참,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느라 앙중앙중대던 작은 입술도 빨간꽃이고,
하얀 얼굴도 흰꽃이랍니다.
분홍꽃잎은 그녀가 사알짝 얼굴을 붉히던 모습이라 내 낙서의 모토가 되어 있는 게
코스모스 그녀이지요.
***
이곳 어느 곳에도 코스모스라는 예명을 가진 분이 있던데,
그래서인지 좋은 느낌을 주더군요.
암튼 그님이 나의 코스모스는 아니구요.
나의 코스모스는 지금은 내곁에서 너무나 멀리 있는 그리움이구요.
어찌보면 철없이 방황하던 날에 만난 구원같은 사람이였답니다.
가끔씩 뒤돌아보며 그 시절을 회상할 때
아름다움이기 보다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라기보다 진하게 나를 울리는 건,
그 사람이 불쌍하게 보이고 나 또한 불쌍해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쓰잘데 없는 얘기를 많이 했네요.
사실, 이사람은 별 볼품이 없는 사람이랍니다
대범한 척 살아도 조그만한 일에도 쉬이 맘 상해하고,
맘이 상하면 그것을 빨리 소화하지도 못하죠.
쉬이 역정도 내고요.
그래서 가시 많은 선인장인거죠.
그것도 전생에 지은 죄로 눈물을 그득 담고 항상 울 준비를 하고
사는 (이것이 이사람에게 내린 천형이라고 알아요)
선인장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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