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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으로 가기

은희의 첫사랑

by 선 인장 2007. 6. 11.

 

 

은희의 첫사랑은 군바리였습니다.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온 시커먼 사내에게 맘을 빼앗긴 게 그 해 초여름.

 

봄은 웬지 만물이 솟구쳐 일어나느라 부산스럽고 사람들의 발길도 바쁘게 하다가,

 

초여름이 되면 제각기 아름다움을 다투며 날마다 피던 꽃들도 다투기를

 

멈추게 됩니다.

 

대부분의 수목들이 다음 해를 위해 가지마다 꽃 대신 잎을 매달아

 

햇빛으로 미역을 감던 초 여름날.

 

어디선가 찐하게 후각을 자극하는 꽃 냄새를 따라 강변을 걷던 은희의

 

눈에 뜨인 군복차림의 사내.

 

사내는 강물처럼 시종 묵묵하였고, 무심코 지나쳐 자신을 그토록

 

설레이게 했던 꽃향기가 밤꽃임을 알고 돌아온 길에도

 

사내는 그대로 앉아있었습니다.

 

발소리를 죽이며 조심히 걷던 은희에게,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앉아 있던 사내가 그제서야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는 눈가에 서린 우수.

 

석양이 우측 뺨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모습이 어찌나 짠해 보이던지

 

은희가 먼저 말을 꺼내고 말았습니다.

 

"저기요. 혹시 우리 동네 사세요?"

 

"아뇨, 여기에서 좀 떨어진 동네에 살아요"

 

머뭇거리다가 한참 후에 말을 꺼낸 사내.

 

은희의 발걸음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그 옆에 앉고야 맙니다.

 

왠지 무뚝뚝한 사내 곁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숙명을 느꼈나 봅니다.

 

긴 한숨과 함께 시작된 사내의 사연은 이러했습니다.

 

이성을 느끼기 시작할 나이 초등학교 4학년.

 

한 동네에 살았었고, 학교동창인 그 여자애는 학생회장과 전교일등을

 

도맡아 했던 자신을 좋아하는 동네부잣집 딸이었답니다.

 

다들 허름한 옷을 입고 다닐 때  그 애의 옷과 책가방은 화사하였고,

 

어쩌다 있는 학교행사나 소풍가는 날은 뿌옇게 분칠을 하고

 

다닐 정도로 부유한 집 딸이었습니다.

 

공부도 꽤나 하던 그 애가 집에 오면 자기엄마에게 하는 말이

 

" 저 아랫마을 누구만 없으면 내가 일등할 수 있는 건데..."

 

하고 자주 말을 해서 동네빨래터에서 그 말이 퍼져나가

 

2백호가 넘는 마을에 그 소문이 쫘악 퍼졌더랍니다

 

그 애가 자주 선물도 하고 쉬는 시간에도 찾아와 자꾸만 말을 붙여서

 

학교선생님들도 그걸 알고 놀리는데, 정작 그 소년은 맘은 있어도

 

자신의 초라한 행색으로 인해  가까이 가질 못했답니다.

 

그 후 일년 뒤, 그 애는 서울로 부모와 함께 전학을 가게 되었고,

 

그렇게 어찌어찌 세월이 흘러 자신이 군대를 가게 되었는데,

 

휴가가 시작되는 오늘 고향으로 오다가 우연히 터미널에서

 

그 애를 만났다고 합니다.

 

쌍커플이 있는 큰 눈과 오동통한 볼은 그대로였지만, 쌍둥이를 업고

 

안고 있는 초췌한 형상의 여성이 자신이 한시도 잊지 않았던 그 여자애라고

 

볼 수 없었답니다.

 

그래서 갈 길을 잃고 멍하니 강을 바라보고 있었노라는 말에 은희의 마음엔

 

짜아한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

 

그 후 까까머리 군인 사내와 편지를 통해 자주 소식을 주고받았고 ,

 

그러다가 사람의 정이란 게 묘한 건지 그러다 그 사내를 깊이 사랑하게 된

 

은희가 어느 날 전방으로 면회를 가게 됩니다.

 

한참 후에 면회소로 허겁지겁 나온 군바리사내.

 

얼굴은 까맣게 탄데다가 말라서 눈이 더욱 크게 보인 사내.

 

둘은 부대 뒷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초여름.

 

야산기슭엔 밤나무가 가지가지 마다 꽃을 흐드러지게 피우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밤나무 숲 아래에 이르러 짚으로 짠 거적대기 가마니 위에 앉았습니다.

 

어떻게 지냈는지 몇 마디 말이 오고간 후, 목이 마르는지 허겁지겁 옷을 벗기고

 

몸을 탐하는 사내가 측은해졌습니다.

 

이 목마른 사내에게 자신이 힘이 된다면 뭐든지 해주고 싶었습니다.

 

은희는 부끄럼가리개 후크를 못 찾아 허둥대는 그를 위해 양손을 뒤로 돌려

 

끈을 풀러 주고, 떨리는 서툰 몸짓의 그가 무안해하지 않도록 치마를

 

조심히 벗었습니다.

 

뒤이은 사내의 거친 숨소리...

 

그날 은희가 거적대기에 누워서 본 것은,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밤나무 사이로 쉴새 없이 날아다니던 한 쌍의 새.

 

그리고 미칠 것 같은 밤꽃향기.

 

약간의 고통과 뭔지 모를 슬픔이 밀려와 눈가를 적셨고,

 

갈증에 메말라서 자신의 몸 위에서 허덕이던 사내의 몸짓이 짠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돌에 부딪쳐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도 모천으로 돌아가려는 몸짓으로, 끝없이 자궁을 향해 헤엄쳐 들어오는

 

그 사내가 불쌍해 보였습니다.

 

그 사내가 불쌍해서 가만히 안으니, 정말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의 심정을

 

알 것 같았습니다.

 

**

 

그로부터 얼마 후 뜸해진 편지.

 

그리고 종내는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육개월이 다 지나도록 끊긴 소식.

 

무엇이 그 사내를 방황하게 하고, 자신이 갑자기 싫어진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은 은희는 다시 부대를 찾습니다.

 

거기에서 들은 말.

 

훈련을 받다 지뢰를 밟아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는 것.

 

급하게 후송된 병원에서 치료 중 그가 건물 아래로 뛰어내렸다는 것.

 

그래서 시신은 가족에게 인계된 후, 그곳 화장터에서 화장되고 말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

 

해마다 이맘때면 은희는,

 

밤꽃향내에 취해서 자신이 인연을 맺었고,

 

밤꽃 향기에 취해 첫정을 바쳤던 그 밤나무 향을 찾아 나선답니다.

 

그 날 그 밤나무 밑에서 맡았던, 그 사내의 비릿한 정액냄새 같은 밤꽃향이

 

진동하는 계절이 오면,

 

은희는 괜시리 눈물이 나곤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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