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장흥에는 4대산이 있고 3개읍(邑) 과 7개면(面) 중 5개면이 바다에 접해있다.
면적은 622.4 ㎢, 15만을 넘었던 인구는 차츰 줄어 현재 281개리(里)에 4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광화문으로부터 정남쪽에 위치한 나루터로써 정남진(正南津)으로 불린다.
지형은 전라남도 중남부에 위치하여 북방은 화순, 보성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고,
서남방은 산악지대로 영암, 강진군과, 동남방은 고흥, 완도군과 경계를 이룬다.
3대강의 하나인 탐진강은 영암군 금정산에서 발원하여 유치, 부산, 장흥에 이르기까지
대소 20개 하천이 합류되어 장흥읍 시가지를 관통하는데 예양강(일명 금강)이라고 하고,
사인암에 이르러 영암군 월출산에서 발원한 금강천과 합류하여 강진만으로 흐른다.
강 유역에는 용반, 부산, 한들 등의 비옥한 평야가 전개되어 있어 농산물이 풍부하고,
강에는 은어가 서식하고 있다.
산악은 노령산맥의 일부지맥으로 유치면의 가지산(해발509.9m), 보성군과 경계인
장흥군의 제암산(807.0m), 안양면의 사자산(666.0m) 장흥읍에 장흥 억불산(518m) 등에
연결되어 있다.
서남으로는 용산면의 부용산(609.0m), 관산읍의 천관산(723.1m)으로 연결되어 남북
일대의 산맥을 이룬다.
이곳은 산과 강과 바다와 평야를 가진 남도의 끝이다.
생업은 주로 농업이고, 바닷가마을에는 어업을 겸하고 있는 실정이다.
농산물 중 쌀은 부산으로 대거 실려가 그 일대에 유통된다.
파나 양배추 다래 등은 광주농산물판매장이나 가락동시장으로 실려 가고,
작약 등 꽃들은 양재동 화훼단지에 판매된다.
그 밖의 대부분의 농산물은 물류비 때문에 서울로 올라가지 못하고 자체 소비되고
있다.
토질을 보면 산은 대부분 황토이고 들녘의 흙은 진흙처럼 차지거나 잔돌이 섞여
비가 오면 쉬이 젖어 흘러내리고, 맑은 날은 금세 단단해져 좋은 식물을 키워내기
힘들다.
환경탓인지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성정이 내륙에 비해 거칠고 억센 편이며,
산촌에 사는 사람들은 순박하고 순종적이다.
장흥에는 4대 산이 있다.
천관산 · 억불산 · 사자산 · 제암산이 그것이다.
노령의 한줄기를 이어받아 산을 이루었으나, 해발이 일천미터를 넘지 못하는
어중쭝한 모습에다가 4개의 대표산들이 드문드문 박혀 제각기 제 위용을 자랑하는
형국이다.
뜻을 보자.
하늘의 관을 쓰고 있으니 천관이요, 억만개의 불상의 형상 억불이요, 동물의 왕인
사자요, 모든 바위의 왕인 제암이다.
그러한즉 누가 제 몸을 굽히려 할 것인가?!
이곳 사람들 역시 큰 사람을 키워내지 못한다.
남 말하기를 좋아하고, 지 잘난 맛에 남이 잘된 꼴을 못 보니 영락없는 촌놈들이다.
산이 하나의 척추라면 들녘은 살이 되고, 길은 동맥과 정맥이다.
하나의 큰 길은 서울에서 대전을 거쳐 광주를 지나 강진을 경유 목포로 빠지고,
다른 큰 길은 대전을 거쳐 광주로 와서 순천 여수로 빠진다.
또 다른 길은 대전을 거쳐 대구를 지나 부산으로 빠진다.
현재까진 정치적인 배려와 경상도 정권의 장기집권으로 부산으로 가는 길이 가장
큰 길이 되었다.
암튼, 패션 물류 문화 돈 모든 것들이 그 이동통로를 타고 오르내린다.
예를 들면 일본의 가라오케나 노래방 문화가 들어올 때 부산으로 상륙하여 대전을
거쳐 서울로 올라간 후 성공을 거두자 다시 대전을 거쳐 큰길을 타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는 식이다.
어디 그 뿐이랴?
패션이나 음식문화도 마찬가지이다.
음식문화를 보면 조개구이가 유행을 타고 오르내리는 경로도 그러하고, 샤브샤브가
유행을 타는 것도 그러하다.
더 예를 들면 부산에서 노래방이 생기면 바로 서울에 노래방이 생긴다.
그 담엔 대전을 지나 광주에서 히트를 친다.
광주만 해도 노래방이 새로 생길 때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순번을 기다렸다.
광주에서 폐업을 하거나 다른 직종으로 변해갈 때쯤 장흥에서는 노래방이 생기고,
그 앞에는 줄을 선 사람들이 장관을 이룬다.
큰 물줄기에서 멀어진 강물이 정체되어 생긴 소(沼)처럼 이곳엔 외지인들이 들어와
정착하는 것이 드물고,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태어나 자라고 늙어 죽는다.
못난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 외지인들에겐 후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할퀸다
고집과 완고함까지 겸비했으니 훌륭한(?) 근성이다.
그 때문에 외지인들은 돈을 벌어 나가고, 현지인들은 돈을 잘 벌지 못하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어쩌다 현지인이 돈을 벌었다 치더라도 이곳에 재투자하지 않고 서울로 혹은 다른
대도시로 투자해버리니 경제역시 맴맴이다.
의식구조도 변화를 싫어하고 일벌이기를 무서워하여 귀찮게 여겨지는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끼리끼리 문화를 좋아해서 계모임이나 학군모임 출신지역 모임 등을 통해
다른 사람이나 자신들의 이해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욕하고 흉보기를 좋아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잘 알지 못하거나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먼저
아는 것이 힘이라 생각하고, 그 소문을 자랑삼아 퍼트린다.
인간의 약점이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 말을 믿고 싶고, 믿지 않다가도 자주 들으면 정말 그러한 걸로
생각되는 인간의 약점이 이곳에서는 극명하게 보인다.
작은 동네라서 그럴게다.
광주만 해도 내 부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옆집아저씨가 다른 여자랑 어디를
가던지 말던지 관심도 없고 신경도 쓰지 않으니 말이다.
달리 좋게 해석하자면 이웃에 대한 관심이고 정(情)이 많기 때문이다.
실지로 음식이나 좋은 물건들은 친한 사람끼리는 수시로 나눠가지고, 일부러 자리를
만들어 가며 맛난 음식들을 먹으러 다닌다.
어디를 가나 친한 사람들끼리는 그런 모양새일 것이나, 이곳 사람들은 멀어질까를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것 같다.
잠시 역사속 장흥을 보자.
고려말 공예태후를 배출하여 관산땅이 중심이 된 장흥은 장흥부(長興府)로 승격되어 강진과
보성 일부까지 합병한 큰 고을이었고, 조선초까지 그 영화를 누렸다.
그래서 아직도 그곳 사람들은 고읍(古邑)이란 지명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그 시기 대마도에 본거지를 둔 왜구들의 노략질이 극심하였다.
우리나라 남해안이나 중국남해안에 기습적으로 상륙하여 저항하는 남자들은 칼로 죽이고
여자들은 겁탈하였으며, 일부는 끌고가 노예로 삼았다.
조정에서는 이를 막고자 인근 강진땅에 병영을 세웠다.
그러나 천관산에 위급을 알리는 봉화를 올리면 그곳에서 엇싸엇싸하고 뛰어오더라도
반나절이 걸리는 거리라 왜구는 이미 도망간 후여서 큰 효과를 내지 못했다.
나중 대담하게도 왜구들이 결집하여 이 병영을 치자 견뎌내지 못하고 산성을 쌓고
산에서 수비에 급급하게 되니 왜구들의 침탈이 더욱 극심하게 되었다.
조정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민초들의 삶은 어떠했을지 가히 상상이 간다.
쌀이 부족한 왜구들의 노략질은 고려말에서 조선초기까지 아주 심해졌다가
대마도 정벌 후 잠잠해졌다.
한편 병영은 군사들과 그 가족들이 가까이 모여 살게 되고, 주막 등이 생기면서
이름이 그대로 지명이 되어 지금도 병영(兵營) 으로 불린다.
전남의 중간지역을 차지하고 앉아있어 한때는 전남도청소재지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정치적인 계산으로 목포에 도청이 생기고 나서부터 이곳은 더욱 소외된 지역이 된다.
조선시대 이순신이 12척을 가지고 재기할 발판을 만들고, 수많은 의병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며, 동학혁명의 최후 격전지를 거치면서 의향(義鄕)이란 이름을 얻고,
존재 위백규선생 등 수많은 문인들을 배출하면서 이곳은 문림(文林)이란 이름을 더하여
문림의향으로 불린다.
세월이 지나 의로운 이는 먼저 가고, 덕 있는 이들은 가난을 면치 못해 몰락해 가니,
이곳의 영화는 이제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근대를 지나 현대를 살아가면서 옳고 그름의 잣대가 없으니, 약삭빠르고 악한 이만이
오래 남아 이곳도 이제 쓸 만한 사람 보기가 드물어졌다.
박정희 그 서슬 퍼런 정권하에서 사무총장을 했던 모씨도 지 고향을 돌보지 않았고,
그 후 몇몇 정권하에서 호남사람(장흥사람을 포함한)을 바지로 앉혀 놓은 장차관들이
있었으나 지역발전을 위해 어느 누구도 기여하지 못하고 뒤안길로 사라져들 갔다.
어디선가 해풍이 불어온다.
길이(長)흥할(興) 장흥골에는 시간이 천천히 간다.
사람들의 의식구조도 배타적이고 고집스러우며, 지나치게 감정적인데다 말투도 세련되지
못하여 투박하다.
그것은 아마도 척박한 땅을 평생 죽도록 일궈도 부자가 되지 못했던 선조들의 한을
대물림한 탓일 수도 있겠고, 일제치하와 동란 중의 수탈과 혼란 속에서 악착을 떨어야만
했던 선조들의 피를 물려받아 그럴 수도 있겠다.
장흥!
청정한 자연이 자랑인 이곳은 아직 깨어나지 않는 땅이다.
어느 지관(地官)의 말마따나 제암산이 한 발을 보성땅으로 뻗어 해풍을 막아주지 못해서
발전이 더디고 빨리 깨어나지 못하는 걸까?
그래서 사람들은 그리 수다들을 떨어대는 것이고??
아니면 식수로 근방 고을 사람들을 다 먹이고도 나눠줄 게 많은, 정말 신이 아껴둔 땅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