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않을 것 같았던 가을이 어느 새벽 찬이슬에 슬그머니 찾아들더니 야산에 단풍나무 부끄럼 타는
새악시 볼처럼 붉으레 물들고, 키 껀정한 억새 소슬바람에 춤을 추니 가을도 무르익었다.
들판을 가득 채우던 벼들도 어느 날 자취 없이 사라져간 걸 보면,
가을은 무엇을 채워가는 것이 아니라 비워가는 것이 아닐까?!
소슬바람이 빈 들판을 건너오고 햇살이 슬라이드처럼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조각들을 기워
가을풍경을 그려낸다.
웬지 허전하지만 막막하지 않고, 쓸쓸하지만 외롭지 않는 날들이다.
해 저문 날을 때로 들녘에서 마주하고 곧이어 쉬이 온 어두움 가운데에서
나의 존재는 빛을 잃고 하나의 정물이 되어간다.
어둠이 소나기처럼 순식간에 나를 가두면 씨줄과 날줄로 엮어진 기억들은
내게 슬그머니 왔다가 아련해져간다.
털프덕 주저앉아 고개를 드니 희끗한 달이 억불산 위에 걸리고,
강에서는 낮 동안 풀숲에 숨어있던 물안개가 이불처럼 덮어와 가로등 불빛도
차가워져 간다.
이미 베어져 빈 나락들판.
어디선가 콩깍지를 태우는지 구수한 냄새와 안개가 델고 온 물비린내가 물씬나고,
말라가는 들판의 잡초와 잎을 떨구고 더욱 선명해진 어느 집 돌담을 넘은 감.
가시사이로 얼굴을 내어민 노오란 유자.
박처럼 커다란 열매를 주렁주렁 단 모과.
나의 집 색깔은 저 감빛이어도 좋으리라.
풍요와 쓸쓸함이 공존하는 계절!
살아보자고 허덕이며 숨가쁘게 건너온 삶의 여정들을 반추하노라면,
휴우~ ~ 회한처럼 깊은 한숨이 나오고 점점이 불을 켠 시내는 흐릿하다.
그리움은 안개처럼.. 이슬처럼 나를 적시고,
계절은 나를 더욱 만추로 몰아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