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떠남의 계절이다.
들녘 논밭을 지키던 나락 등 곡식도 있는 곳을 떠나고, 나뭇가지에서 태어나
한여름 뙤약볕에 본신을 키워주던 나뭇잎파리들도 하나둘 정든 가지를 떠나는
계절이다.
다들 정든 곳을 떠나는 계절에 자연의 일부인 인간도 어디론가 떠나고픈
심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사춘기를 아프게 보내고 청년기에 접어들던 시절 찾아왔던 지독한 몸살같은
방황기의 잔재가 이 계절이 되면 불이 붙는다.
어딘지 목적하지 않아도 무작정 떠나고픈 충동이 자주 인다.
안다.
연륜이 주는 무게와 가족을 건사해야 하는 가장의 무게를 나몰라라 하지 못할
처지에 그러한 감상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그래도 자정을 넘어 피곤에 지친 인생들을 싣고 어둠 속으로 한없이 달려가는
삼등열차 속으로 가고플 때가 있다.
군데군데 얼룩도 지고 구멍이 난 마주앉은 의자에 피곤에 찌든 얼굴들이
처음 만났어도 서로 몸을 기대어 잠들어 있고,
의자를 차지하지 못한 손님들이 의자팔걸이에 엉덩짝을 붙여도
눈치하지 않는 그곳의 풍경들이 눈에 선하다.
어디선가 풍기는 파 냄새인지 땀 냄새인지 냄새가 나고,
드르렁 거리는 코고는 소리마저도 정답던 그 야간열차는 덜커덩거리며
새벽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었다.
*
사자산에 드디어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다.
임도를 따라 산 중턱까지 차량으로 올라가 그곳으로부터 등산을 시작했다.
아침부터 안개가 자욱하더니 정오가 다 되어가도 안개가 그치질 않고
산계곡과 능선에 걸쳐있다.
이 시기에 이곳엔 유난히 안개가 많다.
밤낮의 기온차가 시냇물을 덥혔다 식혔다 하는 사이에 안개는 날마다
환영처럼 피어오른다.
사자산은 제암산(帝岩山:779m)·억불산과 함께 장흥을 둘러싸고 있다.
곰재를 사이에 두고 제암산과 마주보고 있으며, 동서로 400m의 능선이
길게 뻗어 있다.
산 이름은 거대한 사자가 누워서 고개를 든 채 도약을 위해 일어서려는
형상을 하고 있는 데서 유래하였으며 높이는 666m이다.
제암산과의 사이에 있는 능선은 철쭉 군락지대로 유명하며,
1991년부터 매년 5월에 제암철쭉제가 열린다.
또 패러글라이더 30대가 동시에 이륙할 수 있는 이·착륙장이 있고,
5~9월까지는 항상 남풍이 불어 패러글라이딩의 명소로 이름나 있다.
사자산은 10여년전에 산불이 나자 공무원들이 동원되어 진화하다
산불에 갇혀 3명이 희생된 곳이기도 하다.
사자산은 경사가 완만하고 돌이 적은 산이다.
제암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어 사자산 철쭉밭은 알려지지 않은
풍광을 가지고 있다.
탐방로 양쪽에서 떨어진 떡갈나무 잎은 안개에 젖어 바스락 거리지 않고,
사람 손을 탔지만 군데군데 떨어진 도토리며 상수리 열매들이 매끈한
몸매로 낙엽 속에 숨어 있었다.
아직 건정한 키를 자랑하는 억새는 무리지어 피어있는데,
정상에 올라갈수록 꽃잎을 바람에 빼앗겨 가고 있었다.
가을산에서 애기단풍보다 더 붉은빛으로 물드는 것은 옻나무이다.
개옻나무는 그 길쭉하고 넓대대한 이파리들이 일제히 선연히 물들어
가을산을 가을산이게 만든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금방 떨어져서 아쉬움이 남지만,
그 굵고 짧은 생애의 최후가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면
미련은 없을듯 싶었다.
철쭉 사이길과 키 작은 산죽 군락지를 지나 사자산 미봉(尾峰)에서
잠시 쉬었다.
안내하는 형님네 배낭에서 홍초를 믹서한 소주가 나오고,
나는 가져온 감을 깎아 내놓았다.
안개주의보 때문인지 사람들이 많이 모이질 않아 소란스럽지 않고,
안개는 스멀스멀 미봉까지 올라와 꿈결 같았다.
미봉에서 두봉(頭峰)까지는 완만한 경사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여자들이 좋아할만한 쉬운 코스이다.
간이입석대(내가 붙인 이름) 아래에서 텃밭에 키운 배추와 무 잎에다
된장하고 멸치젓 꺼내놓고 만찬을 즐겼다.
땀을 빼고 비스듬한 바위 위에서 먹는 점심은 왜 이리 달콤한가.
홍초소주잔을 건배해가며 배가 불룩해지도록 평소 배나 되게
밥을 먹었다.
몸이 나른해질 무렵 사자산 정상 두봉에 올랐다.
사자산 머리 위에 오르니 내내 잠잠하던 바람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바람은 사자의 갈기를 휘날리다가 탐방객 이마의 땀을 식히고 어디론가
부랴부랴 사라져갔다.
정상엔 안개에 가려 보일 듯 말듯한 빈 들판과 시내가 발아래 펼쳐져
있었다.
정상 부근에 패러글라이딩 출발점이 있다.
바람의 방향과 지형이 글라이딩 하기에 좋은 여건이어서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날개가 있다면..
나도 날개가 있다면 바람에 몸을 맡기고 한껏 날아오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