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각기 다른 피부와 다른 형상을 하고 지구촌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다.
수억 중의 나는, 객관적으로 그냥 사람일뿐이다.
그러나 개인 대 개인일 때, 관계되는 타인 대 나일 때에는 주관적인 나로서
존재한다.
사람마다의 주관으로 나를 바라본다는 말이 되겠다.
나 역시, 관계되는 타인은 주관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 주관적인 관계에서 당신이 나에게 ‘요즘 다들 그래’, 혹은 ‘남들은 다 그리
생각해’ 또는 자신의 생각으로 견주어 ‘이게 맞는 거고, 그건 틀려’ 이리
말하면 안 된다.
차라리 ‘이건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게 아닐까?’ 아니면 ‘내 생각으론
이게 맞는 것 같은데..?’하고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거나, 권유하는 식이어야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흔히들 남의 입장이나 주관을 고려치 않고 ‘그건 틀려’하고 만다.
서로의 입장이 다름을 인식하지 못하고, 맞고 틀림으로 구분 지으려는 어리석음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르다와 틀리다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나와 다른 타인은 틀린 것이다. 나와 다른 타인의 방식은 틀린 것이다’ 이렇게.
그러나 다를 뿐이지 틀린 건 아니지 않는가?!
어떤 사람이 타인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자신은 모르는 사람에게 왜 공격 받았는지를 모른다.
공격을 하는 사람에겐 물론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제3자가 이를 보거나 나중에 들어도 이유가 있다고 본다.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이유가 없을 리 없질 않은가?.
공격한 상대는 나름대로의 주관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나,
주관적인 나는 모르거나 이해가 가지 않는 경우다.
이때의 3자는 무심하게 객관적인 자를 대는 것뿐이다.
아니, 짐작으로 그러그러했으려니~ 하고 생각하니,
얼마큼은 주관적이랄 수도 있겠다.
모욕적인 말을 듣거나 글을 대할 때에도, 나란 존재는 이 주관을 따라간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기분이 나쁘거나 아무렇지도 않기 때문이다.
가령 친하게 지낸 사람이 그랬다면 ‘농담이었겠지’ 하고 웃고 넘어가지만,
잘 모르는 이가 그러하거나, 내가 심적 여유를 갖지 못할 상황에선 농담으로
하는 말에도 기분이 나빠져 발끈하기 마련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주관적인 강이 흐르고 있다.
이 주관적인 내가 없다면 개인과 개인의 의미는 없다.
당신에게 이렇게 생긴 내가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놈이 그놈이라면
나의 의미가 있겠는가?
‘저 사람은 이렇더라’ 혹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더라’ 또는 ‘어떤 생각으로
살고 있더라’ 하는 주관적인 내가 있어야 나와 관계 맺는 타인도 의미를 가지게 된다.
내게도 그 놈이 그 놈이 아닌, ‘내가 아끼는 사람’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
이렇게 정의될 수 있는 사람이 주관적인 내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러하니 주관적인 내 사람에게는 세상의 잣대를 대지 말아야한다.
‘그 사람은 저리 생각하고 있구나’ ‘저 사람에겐 그게 아픔이 되었구나’
‘저 사람은 공격당하는 이유를 모르고 황당해하고 있구나’ 하고,
이 주관적인 내 사람의 말을 들어보고 그 심정을 더 헤아리려는 노력.
이것이 그 사람에게 의미를 주는 친구란 이름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