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방!
사람이 모이는 곳.
상의하고 담소하는 곳.
예전 우리 선조들은 손님이 오면, 다과상이나 주안상을 놓고 이야기를 했다.
현대에 접어들어 차분히 집에서 손님을 받을 시간이 없어지자,
밖에서 손님을 맞고 이야기를 할 장소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 편익을 위한 장소가 다방이고 카페이다.
다방이 있어 우리는 각기 바쁜 직장생활을 하면서 밖에서 손님을 맞아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계속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때, 이 다방이 전국적으로 얼마나 많이 생겼냐 하면 시골 면단위에도
3~5개까지 생겨났다.
이 다방이 하는 일은 실로 방대했는데, 사람을 기다리는 장소가 되기도 하고,
무료한 노인들의 쉼터도 되었으며, 차(열차나 버스 등 대중교통)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에겐 잠시의 휴식공간이었고, 가출하거나 잘 곳이 없는 사람에겐 야간에
자울자울 할 수 있는 간이잠자리가 되기도 했다.
다방은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차를 마시는 풍속은 고조선 때와 삼국시대에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다방(茶房)이란 용어는 고려시대에 기록이 남아있다.
근대의 다방 역사는 커피의 역사와 함께 한다.
고종황제가 1896년 아관파천 때 러시아공사로부터 건네받아 처음 맛을 보고,
너무 신기해했다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서양인이 마시는 차라하여 양탕(洋湯) 또는 가배차나 가비차(加比茶)라고
불렀으며, 신분이 높은 사람만이 마셨다.
그 후 개화의 물결을 타고 신분에 상관없이 다방에 출입하고, 누구나 마실 수 있었으니
엄격한 양반문화를 허무는 하나의 역할을 했을 게 분명하다.
물론 배를 곯던 시대에 지금처럼 아무나 마실 수 있는 차가 아니라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마실 수 있었으니 다방에 출입하고 차를 마신다는 것은,
또 하나의 사회적 신분이 되었다.
처음에는 호텔에서 팔다가 이후 일본이나 서구로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들이 문학모임 등
그들만의 모임장소를 찾게 되면서 다방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군이 들여온 인스턴트커피가 시중에 나돌면서 크게
상업화 되었고, 다방은 시군까지 크게 퍼져 일반인들도 차츰 다방에 출입하게 된다.
처음엔 주로 커피를 마시다가 우리의 입맛에 맞고 배도 채울 수 있는 차가 등장한다.
녹차나 홍차도 있었고, 특히 아침에는 한약재에다가 대추 등으로 우려낸 물에
달걀노른자를 띄워 마시는 쌍화차가 있었다.
이 쌍화차가 가다준 유익이 큰 지라 쌍화차만 전문으로 하는 다방이 생길 정도였다.
다방이 성업하면서 지역에서는 출입하는 것이 하나의 신분이 되어, 고등실업자들의
쉼터가 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농민들이 함부로 흙 묻은 신발로 출입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던 것이다.
적어도 다방에 출입하려면 포마드로 머리 빗어 넘기고, 백구두에 에나멜 칠로
광을 내어 ‘에헴’하고 뒷짐을 진채 잔뜩 거드름을 피우고 출입했으니 아이들이나
여자들은 출입금지 장소였던 것이다.
이 사교의 장이 차츰 일반인들에게 대중화되고 커피를 나르는 여자들이 레지란
이름으로 차츰 배달을 하게 되니, 다방의 질이 떨어지게 되었다.
우후죽순으로 생긴 다방은 차츰 상업화 되고 경쟁을 하기 시작하여, 다방아가씨가
남자들의 성적욕구를 해소시켜주는 역할도 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다방 있는 곳에 여관이 생기게 되고, 여관은 시간제로 손님을 받으면서
밤낮없이 영업을 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면단위 작은 동네에서는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이 한 여자와 관계하는
일까지 생기게 된다.
아무리 자기네끼리 쉬쉬하더라도 같이 재미를 본 누군가 입이 싼 사람이 술자리에서
얘기를 하게 마련이고, 이 소문은 자신이 알기 전에 이웃들이 먼저 알게 된다.
그래서 다방아가씨는 한 달이나 두 달만에 자꾸 다른 곳으로 물갈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항상 신선한 먹이(?)를 원하는 수컷의 본능에 따른 이동이기도 하지만,
한곳에 오래 머무르면 한 가정의 남자들을 동서관계로 묶는 일이 생기기 쉽기 때문이다.
설사 그런 일이 생겼을지라도 더 이상 소문나지 않게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다방의 변태가 심해질 무렵 사회의 인식변화와 인구의 도시집중화로 다방업은 시들어갔다.
거기에 젊은 남자들이 다방출입을 하지 않고, 배달도 멀리하면서 시골에서부터 다방은
불황을 타게 된다.
특히 시골에서 더 이상 수요가 없어지니 다방은 줄어들게 되고, 다방아가씨도
나이가 든 여자이거나 뚱뚱하고 외모가 많이 떨어지는 여자들로 바뀌어가면서
다방업 쇠퇴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그러면, 당시의 젊고 발랄한 다방아가씨들은 어디로 갔을까?
다방에서 돈이 안 되니 고급 술집으로 모였다
가라오케 단란주점 가요주점 등으로 둥지를 튼 아가씨와 젊은 남자들은 또 다른
밤 문화를 만들어갔다.
사적인 남자들의 모임이랄지 계약 등이 고급술집에서 이루어지고,
그곳에서 다시 접대란 명목 하에 성매매가 이루어진다.
성적 목적이 없더라도 노래를 좋아하는 민족답게 지인들과 저녁식사가 끝나면
2차로 가요주점을 찾기 마련이다.
아무튼 기혼 미혼 나이와 직업 신분 등에 관계없이 외로운 남자들의 몸과 맘을
다방아가씨가 달래 주었으니, 다방은 당시 큰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욕구의 완충지대였고, 소외된 남자들의 위로처 안식처였다.
이제 다방은 대부분 없어지고, 카페나 찻집이 생겨난다.
음지에 있던 만남의 장소가 양지로 나온 셈이다.
특히 젊은이나 여자들이 더 카페를 선호하게 되니, 이제는 몇 걸음 건너 카페다.
도대체 저 집은 영업이 잘 될까 해도 밤이면 모여드는 젊은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예전에 나이든 남자들이 주 고객이었다면, 이제는 여자와 젊은이들이 주 고객이다.
사회적 동물인 사람!
이 다방과 카페와 찻집은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도 인류의 생존과
함께 할 것이다.
이 시간 우리는, 그 시대 삶의 애환이 서린 만남의 장소 다방을 알아보았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평가하지 말고,
수컷의(남자의 성적분류)본능이 추하다거나 그 시대의 사람들이 추하다거나 하는
단편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아하! 당시에는 그러했구나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