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뭐든지 한꺼번에 왔다.
여름날 장마가 폭우로 내리더니 뒤이은 땡볕이 대지를 태우고,
가을이 오네오네 하더니 어느새 나락(벼)이 영글어 수확해 가는
것을 보고 가을이 왔음을 느꼈다.
시월의 가을이라..
푸르디푸른 하늘에 날마다 따가운 햇살은 가을가뭄을 가져왔다.
그래도 들녁은 풍성하여 수확하는 손길은 밤낮없이 바빠 있다.
해마다 이때쯤이면 남도 어느곳이나 지역축제가 한창이다.
이곳에 얼마전 억새축제가 열렸었다.
아직은 억새가 만개하지 않던 터에 때 이른감이 있었고
본디 소란한 곳을 좋아하지 않는 습성으로 미루고 있다가,
의형제를 맺은 두분 형님내외 우리식구 이렇게 모여
10월14일 맑고 하늘 푸른 날 산행을 하기로 했다.
여자들은 확실히 사람 많고 붐비는 곳을 좋아하는
습성을 지녔다.
남자들이야 행군코스며 주차며 그런 일정이나 생각하며
묵묵한데, 여자들의 들뜬 기분은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
차 안에서 까르르깔깔깔 웃으며 수다를 떤다.
*
천관산 주차장엔 벌써 관광버스와 승용차들로 꽉 차 있었다.
잠깐 천관산을 소개하자면,
전남 장흥군 관산읍과 대덕읍에 걸쳐 있는 723m의 산으로
온 산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고 바위들은 봉우리마다 하늘을
찌를듯 솟아 있다.
사자바위 부처바위 등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쌓을 수 없는
돌탑들은 대자연의 신비를 느끼게 한다.
주로 꼭대기에 운집해 있는 기암괴석들은 그 모습이 주옥으로
장식된 천자의 면류관 같다하여 천관산이라 하였다 한다.
가수 하춘화의 '영암아리랑'에 나오는 인근의 월출산은
기암들이 크고 웅장한 맛은 있지만,
산세가 워낙 험하여 기암들을 가까이에서 감상하기 어려우나
천관산은 가까이에서 만져볼 수 있는 순함을 지녔다.
비록 바위산이라 산기슭에만 큰 나무가 자라고 전체적으로
산이 큰 나무를 키우지 못한다 해도,
정상에 이르면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기암과 은빛인듯 잿빛인
억새천국이 있으니 누구든 이 가을에 한번 와 볼만 하다.
물론 철쭉들이 만개한 봄이 되면 나름대로의 멋은 있지만,
천관산의 맛은 억새 어우러진 가을이 아닐까 싶다.
노령이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다 바다에 막혀서 더 이상
남으로 향하지 못하고 주저 앉은 곳.
그곳에 천관산이 있었다.
지리산 내장산 월출산 변산과 함께 5대 명산으로 꼽힌다.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천관산엔 10개의 등산로가 있고
어느 코스든 4시간이면 등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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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산 입로 공예태후 탄생지 앞에 차량을 두고 장천재 코스를
택했다.
등산로 초입 만남의 장소 영월정에 이르르니 계절보다 먼저
단풍이 든 등산객들의 울긋불긋한 등산복 행렬을 만났다.
썬캡과 모자를 눌러 쓴 행렬속에 모자쓰기를 끔찍히 싫어하는 난
썬글라스만 걸쳤다.
앞뒤로 끝없는 사람들의 행렬.
주로 산악회 회원들이라 자기네들끼리 무전 주고 받으며
호루라기로 부르고 챙기느라 분주한 모습들이다.
한가지 아쉬운 것이 등산로가 협소하여 교행하기 힘든데,
이 점은 관계기관에서 신경을 좀 썼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인파의 대열속에 우리 일행도 묻혀 천천히 산을 올랐다.
오르다가 넓직한 바위를 만나 아래를 내려다 보니,
해무가 뭉클거리는 바다 저쪽으로 군데군데 작은 섬들이
떠 있었고 고기잡이 배들은 한산하였다.
그 앞으론 나락이 익어가는 들판을 지나 소읍의 집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었다.
날이 맑으면 영암의 월출산 장흥의 제암산 광주의 무등산
제주의 한라산까지 보인다 하나,
해무가 뿌연곳엔 파도만이 잔잔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소나무 숲 사이사이 떡갈나무와 오리나무 등 활엽수종의
크지 않는 나무 숲길이 계속 이어지다 정상에 이르렀다.
금수굴 노승봉 천주봉을 거쳐 좌우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환희대를 올라 넓은 들판과 바로 발아래인듯 출렁이는
바다를 봤다.
그곳엔 가을햇살을 반사해내는 바다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바람이 자고 햇살은 따가울 정도로 내렸다.
연신 흘러 내리는 땀방울을 손수건으로 훔치기를 몇 번.
마침내 천관산 꼭대기인 연대봉이 보였다.
능선으로 융단처럼 깔린 드넓은 억새밭.
구룡봉에서 연대봉으로 이어지는 5만평 약 4km 구간이
온통 억새밭이었다.
억새가 알맞게 피어서 미풍에 살랑대고 있었다.
산에는 억새물결, 산아래엔 바다물결.
와아~ 탄성이 나왔다.
9월말 시작된 억새꽃은 10월말까지 이어진단다.
거의 어른키보다 크고 작은 억새꽃은 해를 안고 바라보면
춤추는 빛무리처럼 보인다.
부드럽고 완만한 능선을 따라 억새 출렁이는 곳에
외곽으로 천주봉 주봉 정원석 양근석 사자바위 부처바위들이
억새를 지키는 수호신이다.
그곳에 억새들이 머금다 내놓은 감로천(甘露泉)이 있고,
맨꼭대기에 왜적이 쳐들어올때 침입을 알리던 봉수대 연대봉이
있다.
억새밭 한켠에서 김밥을 묵은김치에 허겁지겁 먹고,
억새밭 전망 좋은곳에서 억새에 묻힌 사람풍경 몇 컷 사진에
담았다.
***
내려 오는 길.
정원석을 지나니 금수굴과 마주 보게 양근암이 서 있다.
자세히 볼수록 점잖은 사람 얼굴 붉히기 딱 알맞게 금수굴은
여성의 자궁모양, 양근암은 한껏 발기한 남성의 성기를 닮았다.
양근암은 예전 사내를 낳으려는 여인들의 기원으로 만지고
문질러 윤이 나 있었다.
멀지도 그리 가깝지도 않는 곳에 서로를 향해 있는 모습.
이것이 남자와 여자의 거리일 터였다.
아니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이며,
좁혀지지 않을 거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가까이에 있어 구별이 없어지고 너무 멀리 있어 관심이
못 미치는 인간사의 진리를 신은 이리 표현해 놨단 말인가 !
행렬사이를 추월하는 바쁜 사람들과 넓고 굵은 자갈에
미끄러진 사람들 사이로 오후에 햇살이 찬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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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간 코스:
장천재- 금수굴- 연대봉 (2.6km, 1시간20분 소요)
내려온 코스:
연대봉- 정원석- 양근암-장천재(2.3km, 1시간2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