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엔 햇살이 제법 강하더니 새벽이면 차가운 기운이 이불을 당기게
하는 게 가을로 접어드는 환절기인 모양입니다.
출퇴근 길엔 키 건정한 코스모스 빨강 하양 분홍으로 꽃 피워
가을을 먼저 알리고 지나가는 이마다에 흔들흔들 손 흔들어
반가움을 표합니다
한참 새잎을 키워가던 수목은 급하게 생육을 멈추고 잎을 노랗게
물들여 가고, 황급히 2세를 위한 열매맺기를 서두르는 모양새가
어느새 가을은 이렇듯 가까이 와 버린 모양입니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인지라,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 힘이 약한 노인네들은 영면을 찾아
먼길을 떠나 장의사들이 제일 바빠지는 게 이 계절이기도 합니다.
아직 한창인 청년들이야 그런 걸 모르고 넘어간다지만,
나이가 들어가는 어른들은 갑자기 어깨도 허리도 아파지게 되고
잠도 오지 않는 날이 생긴 답니다.
같은 환절기라 해도 스멀스멀 아지랑이 피어 오르는
봄이 오는 길목에는 잠자던 기운이 날마다 샘솟아 오르고,
가을이 오는 길목에선 왠지 힘이 빠지고 쉬이 지치고
몸도 맘도 움추려 듭니다.
해서,
생각이 많아지는 계절
자칫 우울에 빠지게 되는 계절
가을에 만난 인연과는 격정에 빠지게도 만드는 계절입니다.
*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날 알아주는 지인의 후배로 시와 음악을 사랑했던
낭만을 아는 이였습니다
아들만 둘을 둔 주부로 남편은 안정적인 직장에 서른네평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으며,
어깨까지 내려오는 생머리가 아주 잘 어울리는 키가
크고 날씬한 여인이였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에게는 남모르는 외로움이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남들에게는 남편과도 원만하였고 남부럽지 않는
생활에 건강한 외모를 가진 그 여인의 외로움이 정신적
사치로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지만,
그여인에게는 이해받지 못할 외로움이였을 것입니다.
여인을 소개한 지인은 대화를 할만한 사람이라고..
둘이 만나면 대화가 될 거라고 하였습니다.
어쩌다 지인과 셋이나 넷이 같이 갖는 티타임 아니면
점심이나 저녁.
생활에 쫓기던 내겐 별다른 감흥이 없는 일상생활의
한 모습이였습니다.
그 후 여인은 어깨에 시집을 끼고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나의 근무처까지 와서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근처 까페에서 그 여인은 차를 난 칵테일을 앞에 두고
잔뜩 말 멋만 든 내가 '세상을 이제야 알겠노라'고
주절주절 내 얘기만 할때 조용히 이따금 고개를 주억 거리며
듣다가 희미한 미소를 띄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 여인은 얼마뒤 자기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려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아직 젊은 남편과 아직은 엄마의 손이 필요한 아이들을 두고
뭐가 그리도 급했던지...
그때 좀 더 현실적인 얘기를 했었더라면...
그때 당신의 고민이 뭐고 왜 외로움을 느끼는지,
혹은 어떤때 가장 찐한 외로움을 느끼며 그걸 어찌 해소해
가는지를 조금만 알았더라면...
아니 차라리 그 여인과 정분이 났더라면
그녀는 생에 대한 애착을 더 갖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한동안 자책이 되어 나를 괴롭혔습니다.
**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무뚝뚝한 성격에 쉰을 앞둔 직장인 입니다.
어찌보면 나이가 전혀 들게 뵈지않는 키도 크고 얼굴도
하얀 아주 미남형 남자입니다.
보통의 가정처럼 가정생활도 문제 없었고,
직장에서 직위도 웬만큼 차지하여 그 또한 남부럽지
않게 보였습니다.
그 사람은 한가지 문제가 있어 보였습니다.
그것은 남에게 따뜻하게 말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이였습니다.
지극히 내성적인 성격에다가 남과 함부로 어울리지 않는 대신
남이 들으면 냉기가 돌 정도로 말을 냉정하게 하는 게
버릇처럼 보였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전 모친이 농사짓는 본가에 가서 제초제를
마셨더랍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라 주위에선 깜짝 놀랐겠지요?
왜?
모를 일이였습니다.
자신의 유서에서는 주위사람과의 알력과 신병 비관이였다고
합니다만,
그것이 과연 자식과 모친을 두고 자살을 택할만큼의
고통이였는지 우리 보통사람의 생각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티브이 신문에서 유서를 공개하지 않는 이유를 들어 의혹이
있네 맙네 하고 떠들고 한동안 그를 아는 사람들은 정신적
공황에 빠졌었습니다.
정작 자신은 남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처지에
자신의 외로움 때문에 괴로워 하다니요.
난 이들을 철이 없거나 이기심이 많은 이들로 이해할려고 합니다
자신만 고통에서 벗어나면 되나요?
자신만 그리 가버리면 남은 식구들과 주위사람들이 겪을 몫은
마지막 주고가는 선물인가요?
그래서 일찌기 부처가 '인간의 생은 고해의 바다'라고 설파
했음인데,
참..
***
우리
살아 봅시다.
살아야 합니다.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운명과 숙제를 힘들어 못하겠다고
팽개치고 중퇴해 버리는 어리석음의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라도
살아야 합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노라면 기쁜일도 있겠지요.
얼마전에 산에 올랐습니다.
연보라색 칡꽃이 피어 있더군요.
여름날 모아논 영양분으로 통통이 살을 찌운 칡뿌리가 꿀벌과
나비들을 불러 모아 열매를 맺기위한 향연이지요.
코스모스 밭에서 계절을 찬양하던 빨간 잠자리는
밤에 이슬을 피하려
자꾸 내 창문에서 졸다가 미끄러지고 있습니다.
이때쯤이면 훌훌 털어버리고 무작정 떠나가고픈 계절병이
나로하여금 아직 살아 있음을 알게합니다.
때론 당신 생각도 간절해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