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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으로 가기

해동사海東祠와 안중근추모역사관

by 선 인장 2025. 7. 17.

 

 

ㅇ. 대한제국의 탄생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1897년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10월에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했다.

대한제국은 자주독립 국가임을 밝히고 국방력을 강화시켰다.

1904년 일본이 러일 전쟁을 일으켰고 대한제국은 국외중립을 선언했으나 일본의 위협으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했고, 이듬해 을사조약을 통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조선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조선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으나, 일본은 이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1910년 강제로 대한제국을 일본에 병합했다.

 

ㅇ.안중근의 탄생과 투쟁

    1879년 9월2일 황해도 해주부에서 3대째 진사 벼슬을 하던 안태훈의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몸에 7개의 점이 있어 아명은 응칠應七이었고, 이름은 중근이었다.

대한제국의 탄생과 함께 태어나 을사조약에 이은 을미사변과 대한제국의 멸망 등 시대의 혼돈 속에 자랐다.

6세 때부터 9년 동안 할아버지의 가르침 아래 유교 경전 등 한학과 조선 역사를 배우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더불어 말타기 사냥 등 무예를 연마하여 15세에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다.

1906년 3월에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거하여 초등학교인 돈의학교 설립과 중등학교 삼흥학교를 인수하여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과 함께 직접 아이들을 가르쳤다.

1907년 고종황제 강제 폐위와 군대해산 등의 시대적 상황으로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했다.

1908년 홍의산전투, 산아산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영산전투에서는 일제에 포로로 잡힌 동지들의 정보 유출로 습격을 받아 참패를 당하고 국내진공작전은 무산된다.

1909년 2월 7일 러시아 제국 연해주 카리에 위치한 자작나무 숲에서 안중근 의사와 김기룡, 백규삼을 주축으로 12명으로 결성된 동의단지회를 결성하였고,이를 단지동맹(斷指同盟)이라고도 한다.

그 명칭대로 이들은 왼손 약지 앞쪽을 끊어 그 피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란 글자를 썼고, 이 과정에서 안의사는 엄인섭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김기룡을 포함한 나머지는 이완용, 박제순, 송병준등의 거물 친일파를 처단하기로 했다.

 

ㅇ.안중근의 의거

    1909년 이토히로부미가 만주를 방문한다는 기사를 접하고, 10월23일 오전에 이발을 하고 사진관에 들러 사진을 찍은 후 우덕순, 조도선 동지는 채가구역에서 안의사는 하얼빈에서 이토를 기다렸다.

이때 이토는 만주를 러시아와 양분해 먹기로 협약을 맺으러 가는 길이어서 러시아 의장대까지 동원된 상태였다.

1909년10월26일 9시30분 열차가 채가구역을 지나쳐 하얼빈역에 당도하였고, 이토가 러시아의장대를 사열 후 일본환영단을 향하던 그때 안의사는 품안의 권총을 꺼내어 이토에게 3발을 적중시켰고 바로 “코레아우라(대한독립만세)”를 3번 외치고 체포되게 된다.

이는 곧 미국 이탈리아 일본 등 신문 1면에 대서특필 되었고, 그 의거가 대한독립을 위한 대의였음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다.

3주 뒤 일본 법정에서 이토의 15가지 죄상을 밝히고, 이는 개인 자격으로서가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행한 독립운동이었음을 밝힌다.

이듬해 2월14일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옳은 일을 했으니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며 항소하지 않았다.

뤼순(여순)감옥에서 자신의 삶의 역경과 투쟁사실 등을 기록한 ‘안응칠역사’를 집필하고, 한· 청 ·일이 공존하며 공동번영을 이루자는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다 3월26일 순국하였다.

‘동양평화론’ 집필을 마칠 때까지만 사형을 늦춰달라는 청을 일제도 동의했으나, 독립운동이 거세어질 것을 의식한 일제로부터 급히 집행되었고 그 시신은 암장하여 그 유해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안의사는 순흥안씨였고 이북에 많이 모여 살았으나 일제의 탄압과 억압을 피하여 인근으로 흩어지고 안의사의 딸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 후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반공을 국시로 삼은 국가에서 독립운동가나 그 후손들을 돌보지 않아, 일제로부터 전답과  적산가옥을 물려받은 매국노 집안은 대대로 부를 누리고 살았고, 독립운동가들은 그 업적을 평가받거나 재조명 받지 못하고 국가로부터 외면받아 가난을 대물림하였다.

독립운동가 일부는 인근 국가로 이주하여 아직도 독립된 나라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대를 이은 떠돌이 생활로 연명하고 있다.

 

ㅇ.해동사와 추모역사관

    1955년 이곳 장흥땅 죽산안씨문중에서 안홍천이 이승만초대대통령을 찾아가 “이렇게 나라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하신 분을 제사지내는 곳이 없으니 우리 죽산안씨 문중에서라도 제사를 지내게 해 주십사” 청원하여 ‘해동명월’이란 휘호를 받아와 안씨문중 만수사 곁에 ‘해동사’를 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비록 유해는 모실 수 없었으나 딸로부터 영정과 위패를 받아와 사당에 모신 것이다.

2025년 3월26일 순국일에 맞춰 제사를 지내니 115주기요, 안중근추모역사관을 지은지 1년째이다.

추모역사관은 안의사가 독립운동을 하게 된 계기와 업적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곳에 연이 닿아 근무하게 되니, 나라를 위해 뜻있는 일을 한다는 긍지와 보람을 느낀다.

이 땅에 내가 어찌 서 있고, 우리 민족과 나라가 어떻게 지켜져 왔는지 후손들은 알 필요가 있다.

특히 이곳이 배우는 단계에 있는 학생들에게 필수 견학코스로 지정되어, 민족의식과 혼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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