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일을 이틀 앞둔 막바지 아침이라, 유세차량이 일찍들 찾아든다.
덕분에 몰래 전신주에 나뭇가지 물어 나르던 까치 깜짝 놀라 헛발 내딛다
겸연쩍은 모습으로 달아나고, 간밤의 비에 꽃잎 떨구던 벚나무 무슨 일인가
고개를 내어민다.
사거리마다에 늘어선 선거원들은 저마다 푯말을 들고 지나가는 이들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느라 모처럼 거리에 생동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번엔 바꿔보자, 내가 가야만이 지역발전이 있다... 떠들어 대는 선량들의
열정이 언제까지나 지속되기를 바라는 헛된 욕심이 투표소로 발길들을
이끌어갈 것이다.
자본주의와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민주주의는 많은 문제점을 보여왔다.
정치체계도 결국 인간을 더 행복하게 하기 위해 만드는 건데,
어느 체계도 지상낙원을 실현시키지 못함으로써 우리는 차별과 불공평을
감당해내야 하는 것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보듯 빈부와 차별은 인간의 존엄을 무디게 한다.
빈부와 차별이 만들어 내는 사회적 계급들 사이에서 선량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
가려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란 무엇일까?
사회정의란 무엇일까?
어릴 적 미디어의 선구자였던 라디오에서 인기를 떨쳤던 장소팔이란
코미디언이 있었다.
물론 예명이고 남들이 가니 자신도 장에 소 팔러 간다는 익살스러운 예명이었다.
인간들은 시대의 경계를 넘어서 남녀노소를 떠나 확실히 그러한 경향이 있다.
남들이 시장에 가면 나도 따라가고 싶고, 그러지 못하면 남들에게 뒤쳐진다는
조바심이 있는 것 같다.
이는 소신이 없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중요시하는 사람일수록
그러한 경향이 강하고, 그런 습성들은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는다.
자신의 주관보다 남들의 눈치를 보며 사는 것이다.
한 번뿐인 생을 어찌 살아야 할 것인지.. 내가 지금 가는 길이 어디메쯤이고
내가 애초 가고자 하는 길이 무언지를 잊고 사는 모습이다.
살다 보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가 헷갈릴 때가 있다.
오늘날 우리는 언어의 홍수와 순박하고 어리석은 인간 본연의 마음을
파고드는 술수의 난장에 서 있다.
특히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신문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시청하다 보면
패널들의 언변에 자신도 모르게 동화되어, 남들에게 마치 자신의
소신 인양 말하는 이들을 대하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말의 진의를 구별하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지난날에 비추어 현실의 흐름을 알고 감지하고 판단하여야 한다.